Bardo2025

4채널 비디오와 컨트롤러, 소프트웨어, 멀티미디어 설치, 가변크기

아티스트 토크 | 촬영. 김예지


서문. 김재아(jagdsloth@gmail.com)

스크롤을 내리면 또 다른 허공으로 미끄러진다. 티베트어로 ‘틈’을 의미하는 바르도(bardo)는 죽음과 다음 생 사이, 윤회의 굴레에서 이탈한 잠시의 시간을 가리킨다. 사이의 영역에 떨어진 존재는 새로운 삶을 향해 끝없이 수레바퀴를 굴리지만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다. 숏폼을 넘기는 손가락이 마지막에 도착하는 일을 영원히 유예하는 것과 같다. 

15초에서 60초를 넘지 않는 짧은 영상은 만나자마자 바로 다음 순간을 짐작하게 한다. 진짜 사물처럼 보이는 케이크는 곧 반으로 갈라질 것이고,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은 인터뷰에 응할 것이며, 인플루언서는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익숙한 춤을 출 것이다. 할당된 시간을 완전히 통과하기도 전에 미세한 단위로 조각내어 결말을 선취하는 소비 방식은 관람자를 응시의 대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튕겨낸다. 패턴이 끝없이 이어지는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부유하던 정신은 홀린 듯이 영상을 넘기다 퍼뜩 멈추기도 한다 - 나 지금 뭘 하고 있지? 그러다 이내 손가락은 물레를 감듯(reel) 매끄럽게 지나친다. 자아에 잠시 부착되었던 의식은 다시 경계로 밀려난다. 


촬영: 김예지
촬영. 김예지

《바르도》는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이행하는 윤회의 무한한 순환 구조와 끊임없이 숏폼을 밀어내는 시간을 포개 놓으면서, 전시는 빠른 전환의 리듬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비자발적 명상이 자아를 잊고 더 넓은 세계로 접속하는 불교의 무아지경(無我之境)과 연결될 수 있을지 질문한다. 수직적 구조를 구현하는 다채널 영상 설치와 관람을 위해 조작해야 하는 물리적 컨트롤러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끝없이 진동하는 숏폼의 경험을 감각 가능한 세계로 소환한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스크린 앞의 관람자는 가상의 플랫폼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때 숏폼은 개인화된 기기 안의 분화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같은 차원 안에 공존하는 실재로 다가온다. 숏폼 시청이 시간의 흐름을 지연하는 것처럼 컨트롤러의 휠을 돌려 영상을 넘길수록 더 큰 저항이 발생한다. 물질세계에서 비롯된 데이터가 픽셀화된 부처-인플루언서의 형상으로 환원되는 스산한 경계적 지평 위, 바퀴를 굴리는 수행은 점차 무거워진다. 

엄지효는 짧은 콘텐츠의 문법을 충실하게 전유하면서 영상에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1]의 공허한 정서를 안개처럼 드리운다. 로보틱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깔리는 가운데 영상 속의 부처는 삭막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점점 정교해지는 평면 도형을 머리에 맞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유명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춤을 춘다. 인간의 몸으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신성한 부처의 도상은 수많은 숏폼 속 인물을 지시하는 텅 빈 기호이자 단순한 문화적 레퍼런스로 격하된다. 영상을 채우는 기묘한 거리감은  숏폼을 볼 때 익숙하게 진입하던 유사 몰입의 상태를 낯설게 돌아보게 한다. 

거친 픽셀들로 이루어진 영상은 이미 무의미해 보이는 대상을 다시 지시하며 낮은 해상도로 변형된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의 속성을 따르지만 모션 캡처로 얻은 데이터를 가공하여 정교하게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는 작은 스크린에 비치는 허상 너머 실재하는 사람이 숏폼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소비자의 중독적인 시청 습관과 소모하는 시간, 영상을 넘기는 상호작용 역시 실제 세계에서 발생하는 물리적인 요소이지만, 그저 관심 경제에 이용되는 미미한 데이터로 치환된다. 생산과 소비는 서로를 가능하게 하면서 어떤 수행을 디지털 세계 안으로 귀속시킨다. 광고 영상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콘텐츠를 생산해 온 엄지효는 스스로 숏폼의 열렬한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상업 또는 비상업적 영상이 생산되는 구조 안팎에서 작업을 전개한다. 엄지효의 영상은 미술/비미술, 현실/가상의 공간으로부터 동시에 이탈하고, 두 공간에 동시에 출현한다. 숏폼 플랫폼에 업로드된 작품에 대한 유저들의 반응과 댓글은 다른 영상과 다르지 않다. 이때 전시장과 숏폼은 서로를 재인식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숏폼은 다음 영상이 나올 가능성의 무한한 갈림길로 구성된 거대한 미로이다. 보르헤스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서 우리는 미로 안에서 모든 것을-동시에-선택하고, 미래는 끝없이 증식하며 갈라진다고 쓴다. 알고리즘에 따라 구분되는 작은 세계는 끝없이 분화하고, 모든 유행, 미적 카테고리, 유명해진 사람들의 이미지를 만화경 속 패턴처럼 무수히 펼쳐 놓는다. 우리는 같은 순간에 하나의 영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짧은 가능성을 동시에 목도하는 셈이다. 어떤 것도 출현할 수 있다는 기대와 언제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통제감은 우리를 미로 안에 계속 붙잡아두면서 돌리기 어려운 휠처럼 무거운 죄책감을 선사한다. 이는 일상에 단단히 묶여 있는 자아로부터 이탈해 경계를 떠돌다, 방황을 자책하며 허겁지겁 다시 복귀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빠른 몰입을 두는 구조가 만들어낸 현상을 개인의 의지에 귀인할 수는 없다. 플루서의 말처럼 우리가 기술적 이미지에 따라 시간성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이미 숏폼의 시간을 살고 있다. 윤회가 하나의 존재로부터 다른 존재로의 이행이라면, 이 경계적 미로에서 헤매는 일은 끝없는 진자 운동과도 같다. 지금 우리가 경계의 공간과 시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도피와 책임의 진동은 멈추지 않더라도 느려질 수 있다. 넓게 펼쳐진 거대한 미로 안에서 소비와 생산이 서로를 포섭하는 구조는 배경이 아닌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1] 본래 경계가 흐려지는 중간적 공간을 뜻하며, ‘역공간’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서브컬처의 맥락에서 익숙한 장소가 낯설게 느껴질 때의 섬뜩한 감각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감각은 복도, 공항, 로비처럼 대기나 이동을 위한 경계적 공간에서 일상적인 활기가 사라지고 부재가 자리를 대신할 때 출현한다.



기획. 엄지효
영상 제작 및 소프트웨어 개발. 엄지효
피지컬 엔지니어링. 공재이
서문. 김재아
설치 도움. 류우영, 현유리, 송민경, 안상욱
촬영. 김예지

2025 청년베프 전시프로그램 BeF_Storage 공모 선정, 서대문구청 청년베프, 한국

Exhibited at
《Bardo》, 2025, BeF Storage, 서울, 한국